이란 축구를, 이란 히잡 시위를 응원하며
[이근윤의 사우디, 중동이야기] 시위 가장 큰 동력은 ’ 10대 여학생들’ 교육공무원 학교에서 내쫓고 최고종교지도자에 손가락 욕하고 “스카프 벗게 해달라는게 큰 요구냐” 320명 이상 희생...봇물처럼 번지는중
이란 축구팀에 의해 다시 부각된 시위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이란 대표팀이 자국의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는 방식으로 본국 시위대와의 연대를 간접적으로 표명하자, 전세계적으로 이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최근 이들이 본국 귀환 후 처형 당할수도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이미 시위대에 연대를 표한 다수의 유명인사들이 체포된 바 있어 공수표에 그칠 것 같지 않다는 불안감이 흐른다. 이웃 라이벌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이란 시위 소식이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지난 9월 13일 수도 테헤란에서 22세 쿠르드족 출신 여성 마흐사 아마니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잡혀간 뒤 의문사했다. 경찰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경찰봉에 머리를 구타당했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분노한 이란 여성들이 히잡을 찢으면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에 “독재자에게 죽음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합세하며 시위는 전방위적으로 확산했다.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 또한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사회 계층 및 나이를 막론한 다양한 시민들이 합세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이 아닌 도시와 마을 수 십여 곳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아마니의 죽음으로 시위에 불이 붙은 것은 맞지만, 이번이 최초의 히잡 반대 시위는 아니다. 2017년 12월 27일 모바헤드라는 31세의 이란 여성이 스카프를 흔드는 영상이 SNS에 광범위하게 공유되며 인기를 끌자 당국이 이 여성을 체포했고, 이에 반발하여 다른 여성들도 같은 종류의 영상을 업로드하기 시작하며 시위로 발전된 바 있다. 이번 시위도 긴 흐름에서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MZ세대가 적극 나서고 가족들이 지지해
그러나 이전의 시위와는 저항의 규모와 기간 그리고 진압의 방식과 희생자의 규모에서 비교할 수 없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란 여학생들의 참여다.
이란 여학생들은 스카프를 흔들며 성직자들을 향해 거센 항의를 함으로써 전례 없는 시위를 이끌어가고 있다. 수도 테헤란 바로 서쪽에 위치한 카라즈에서 소녀들은 교육 공무원을 학교에서 강제로 쫓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SNS에 게시된 영상에는 그들이 “수치스럽다”고 외치며 그가 문을 통해 도망갈 때까지 빈 물병을 던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카라즈의 또 다른 영상에서는 학생들이 “우리가 단결하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하나씩 죽일 것”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남부 도시 쉬라즈에서 수십 명의 여학생들이 머리 스카프를 공중에 흔들며 “독재자에게 죽음을”을 외치면서 주요 도로에서 교통을 막았다. 여학생들의 시위는 카라즈, 테헤란, 북서부 도시인 사게즈 및 사난다즈에서도 보고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고 교실에 서 있는 사진도 찍혔다. 심지어 일부는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와 이슬람 공화국의 창시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초상화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모욕하는 등 이전 세대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격한 양상을 띄고 있다.
이란 지도부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상대는 더 이상 야당 정치인이나 20대가 아니다. 최고 지도자의 사진을 불태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10대 여학생들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저항이 심상치 않은 것은, 이전 세대가 순응했던 삶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말하고 있으며, 아직 자라나는 세대이기에 언젠가는 이들이 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기 시작했기에, 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외면하지 않고 시위에 동참하며 촛불이 횃불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학생들의 시위는 모든 국가 문제에 대한 최종 발언권을 가진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침묵을 깨고, 이란의 숙적인 미국과 이스라엘이 “폭동을 조율했다”고 비난한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그는 폭력적인 진압으로 시위에 대응한 보안군을 전적으로 지원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국민들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사우디, 이라크 등을 공격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미국 CIA의 첩보도 있었다.
그러나 시위는 전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 시위가 민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뭔가 대단한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스카프를 쓰기 싫을 때 쓰지 않을 수 있는 단순하고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직 어리기에 복잡한 정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들에게 자유가 없다는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지금 모든 학교와 대학은 잠재적으로 시위대의 본부나 다름없다. 매일 학교에서 10대들은 삼삼오오 모여 체제 전복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할지도 모른다. 과연 이슬람 공화국은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

자유를 잊지 못하는 이란 국민들
이란 치안 당국은 공식적으로는 현재까지 시위 진압 과정에서 발포도, 폭력진압도 없었다는 입장이지만, 이들이 거리에서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쏘는 장면이 촬영돼 공개됐다. 노르웨이 소재 IHR이라는 인권단체에 따르면 진압대에 의해 최소 326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여기에는 최소 4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포함되며, 31개의 이란 주들 중 25개 이상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시위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한국인으로서는 한가지 익숙한 모습과 또 생소한 장면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경찰에 붙잡혀 간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의문사하면서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간 과정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불거진 1987년 6.10 항쟁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제2의 광주가 될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졌으나, 올림픽을 앞둔 군부가 미국 등 해외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폭력 진압을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6·29선언에 의해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지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87년 체제’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되었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는 획을 긋는 소중한 순간이 된 셈이다.
당시에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대적인 시위에 직장인 넥타이 부대와 아줌마 부대 등이 호응하면서 전국적인 시위로 번져나간 점이 이번 이란 시위와도 겹치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시위의 목적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독재 세력을 몰아내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할 권리를 회복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이란에서는 ‘히잡’이라는 관습을 강요하는 종교 권력에 맞서 여성의 자유를 되찾겠다는 종교적이고 관습적인 것으로 한국인 입장에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9년 팔라비 왕조를 몰아내고 이슬람 공화국을 건설한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 이슬람에 의해 멸망하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이래로 이란은 쭉 이슬람교, 그중에서도 소수파인 시아파의 맹주 노릇을 해 왔지만 1979년 이전까지 이슬람 신앙은 민중들의 삶 구석구석으로 침투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로부터의 독립을 지원해 주었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정치경제적 동맹관계를 형성하면서 광범위하게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혁명 직전의 테헤란은 환락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서구식 자유주의와 향락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보수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최고지도자’라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국민들이 선거로 대통령을 뽑더라도 최고지도자가 모든 사안에 대해 최종적인 거부권을 갖고 있어 그의 뜻을 거슬러 정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정교합일 체계를 만들었다. 이후로 이란의 모든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이 강제되었고, 치마나 노출이 있는 옷을 입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를 어길시에는 도덕 경찰에 의해 체포와 구금, 구타 등의 방법으로 계도를 받게 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사우디도 1979년에 무장세력이 메카를 점령하여 시위를 벌였고, 결국 유혈 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국왕이 시위를 벌였던 원리주의자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모든 여성들은 온 몸을 가리는 ‘아바야’를 입어야 했고, 남성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해졌으며, 운전도 금지되었다. 영화, 음악, 미술 등 모든 대중 예술은 금지되고, 마찬가지로 이를 어길 시에는 종교경찰의 제제를 받는 등 사우디는 그야 말로 무함마드 시대 수준의 보수적인 사회로 회귀하고 만다.
그러나 사우디는 건국 초기부터 보수적인 원리주의 이슬람 세력인 ‘와하비즘’의 강한 입김이 있었기에 극단의 정책도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무난히 수용되어 온 반면, 정치 세력은 이슬람 원리주의로 바뀌었지만, 일반 시민들의 의식은 여전히 자유로운 삶의 방식에 젖어 있는 이란에서는 끊임없이 정부 정책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필자도 2016년 오바마 정부에 의한 이란 핵합의가 이뤄지면서 사업차 네 차례 이란을 방문하며, 소문만 들을 때는 사우디 못지 않게 강경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매우 다르게, 실제 이란 시민들의 삶은 여느 서구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게 개방적이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일종의 문화 충격을 느낀 바 있다.
결국 40년을 넘게 억압받아 온 이란 여성들의 자유를 향한 함성이 봇물 터지듯 거세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연령, 모든 성별의 이란 시민들이 연대를 표명하며 시위는 이어지고 있고, 급기야 축구 월드컵 대표팀이 국가 제창을 거부하는 장면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들의 국가 제창 거부는 자신들의 여동생들을 향한 연대다.

이란 정부, 개혁·개방 나서고 여성 지위 향상을
결과는 어떻게 흘러갈까?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서는 시위대가 최근 석유화학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팔라비 왕조가 붕괴됐을 때 석유화학 시설로 공격이 확산되면서 이뤄졌다는 묘한 뉘앙스의 보도를 내어 놓은 바 있다.
같은 방향으로 치닫던 중동의 앙숙 사우디는 시위와 저항이라는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아닌, 새로 등극한 젊은 왕세자에 의한 개혁이라는 위로부터의 변화에 의해 사회가 점차 바뀌고 있다. 이제 사우디에서 히잡은 더 이상 강제사항이 아니며, 특히 외국인들은 완전한 복장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 운전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보호인 제도를 철폐함으로써 남성의 동의 없이 자유로운 사회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왕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개혁은 적극 홍보하면서도, 여성 인권 운동가를 구금하는 등 아래로부터의 변화에 대해서는 매우 냉정한 태도를 취하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라기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이란식의 폭압적인 원리주의 이슬람 정치가 이번 시위를 계기로 완전히 전복되지는 않더라도, 권위적인 정치 방식을 포기하고 민중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상당한 수준의 개혁과 개방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가뜩이나 미중 패권 전쟁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세계가 더 이상 전쟁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암울한 때에 폭압적인 방식으로 시대에 역행하는 종교관행을 관철하려는 정부가 존재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이웃 국가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정치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세상을 더욱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는 일이라 생각한다.
부디 이란 내의 시위대와 국제 사회가 잘 공조하여 이란 지도부가 전향적인 자세로 개혁과 개방을 받아들이고 더 큰 유혈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만족할 만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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